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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벨져릭] 변하지 않는 것


"벨져."
"지금 책 읽고 있는 거 안 보이나?"
"안보이는데."
"릭 톰슨."
"매일 그렇게 내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릭 톰슨, 릭 톰슨. 난 말이오, 벨져. 이럴 때만 불러주라고 내 이름이 있는 것이 아니오!"
"그렇다면?"
"뭐?"
"그렇다면, 언제 불러주길 원하지?"

평소와는 다른 능글거림으로 피식, 웃으며 내 어깨에 팔을 올려오는 그. 어디 한번 말해보라는 듯이 행동했지만 나는 살짝 어깨를 으쓱이며 모르는 척했다. 벨져와 눈을 조금이라도 마주치면 안 될 것 같아 일부러 시선도 피했다.

"언제."
"……."
"릭."
"알면서 놀리지 마. 평소에도 불러달라는 말이지 않소. 설마 침대에서만 불러줄 거라고는 하지 않겠지."
"흠, 글쎄. 생각해보겠다. 침대에서라면 자신은 있는데."
"됐소. 생각이라도 해보겠다니 감사하군."

릭은 그의 팔을 내리고 방을 나서며 중얼거렸다.

"…괜히 기대하게 하지 말란 말이오."

벨져가 고개를 돌려 내 쪽을 바라보았지만, 이 말은 듣지 못한 것 같았다. 방을 나가자마자 게이트를 열어 집으로 갔다. 더 벨져와 마주하고 있었다간 해서는 안 될 말까지 했을 뻔했으니까. 조용히 소파에 쓰러지듯 누워 조용히 눈을 감았다. 별것도 아닌데 왜 민감하게 굴었는지 모르겠다. 조금은, 미안했고 조금은. 조금 많이. 그에게 많이 기대하고 있었던 것 같다.

"나 가끔은 그대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 모르겠어 벨져."

누군가 내게 해답을 알려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살짝 주먹을 쥐었다가 풀고 손을 올려 눈을 가렸다. 길게 한숨을 내쉬고 그를 생각했다. 그의 어느 모습이 진짜인지 모르겠다. 그렇다면 내가 알던 벨져는 어떤 사람인가. 오만하고 날카롭고 차가운. 하지만, 소중한 사람을 지키기 위해 몸까지 희생할 줄 아는. 입술이 떨려왔다.

"젠장, 그대에게 뭐가 아쉬워서 이런 생각을."
"뭐가 아쉬운데."
"……."
"무엇이 아쉬운지 물었다."
"벨져? 또 환영인가."

나는 헛웃음을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나 그를 올려다보았다. 여전히 조각 같은 얼굴이군. 아름다워. 나는 손을 뻗으려다 내려놓았다. 벨져로 보이는 환영은 내 행동에 고개를 갸웃거리며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표정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잠깐 정적이 흐른 뒤에 그가 먼저 입을 열었다.

"뭐 하는 거지?"
"잠들지도 않았는데 그대가 보이오. 그대를 만지면 당장에라도 사라질 것 같아."
"하, 겨우 그런 것 때문에."
"겨우 그런거라니? 얼마나 소중한데. 가끔은 이렇게 혼잣말이라도 하면 마음이 편해지곤 하지. 하지만 그대가 사라지면 다신 나타나지 않을 거란 말이오."
"그럴 일 없다."
"그걸 어떻게 확신해? 그대는 내가 불러낸 환ㅇ…."
"시끄럽다."

환영이 고개를 숙여 나에게 다가오는가 싶더니 쪽, 하는 소리와 함께 떨어져 반대쪽 소파 끝으로 걸어가 앉았다. 잠깐 정신이 멍해져 다시 원래 상태로 돌아오기에는 시간이 걸렸다. 그동안 온갖 생각들이 머릿속에 스쳐 지나갔다. 환영이 아닌 건가? 진짜, 벨져라고?

"벨져?"
"네가 지금 많이 혼란스럽다는 것은 알겠군. 그래, 어디 내게도 혼잣말을 해보는 게?"
"내, 내가 그대에게 어떻게..!"
"릭 톰슨. 난 지금 네가 생각하는 벨져 홀든이 아닌, 네가 만들어낸 환영의 벨져라고 말하는 것이다."

벨져의 말에 다시 생각에 잠겼다. 도대체 무슨 말이 듣고 싶어서? 들어봤자 그대에게 하나도 좋을 것 없는 소리라는 것을 뻔히 알고 있을 텐데 무슨 생각으로 내게 이런 말을 하는 것일까. 나는 심호흡을 하고 진정한 상태로 벨져를 바라보았다. 우아하게 다리를 꼬아 팔짱을 끼고 긴 속눈썹을 아래로 내려 바닥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내게 시선까지는 주지 않겠다는 건가.'

오늘따라 그의 눈이 보고 싶었다. 겁쟁이, 용기가 나지 않아 꾹 참았다. 눈을 마주 봤다면 아무 말도 하지 않았겠지만 내가 편하게 말할 수 있게 해주는 그의 세심한 배려에 조금은 감동했다.

"내가 마지막에 했던 말, 들었소?"
"……."
"푸흐, 듣지 못했나 보군."
"뒤돌아서 나가기 직전 중얼거리는 네 말을 전부 들었다면, 붙잡았겠지."
"……."
"안 그런가?"
"맞는 말이군."

나는 반대편에서 똑같이 팔짱을 끼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 입에 물었다.

"담배."
"이런, 버릇이 되었나.. 미안하오."

나는 물고 있던 담배를 입에서 빼고 바닥에 내려놓았다. 고개를 숙여 내려놓은 담배를 보고 있자니 벨져가 내 쪽을 보고 있는지 시선이 느껴졌다. 무슨 일인지 이제는 담배를 쳐다보고 있는 것 같았다.

"언제부터 다시 피우기 시작했지?"
"으음, 좀 됐지."
"이렇게 환영의 나를 불러놓고 담배를 피우며 이야기한다, 라."
"할 말이 없소. 끊겠다고 약속했었는데."
"그래서, 할 말 먼저."
"..그렇지."

자주 다른 이야기로 넘어가 원래 말하려던 것을 잊어버리곤 했다. 그럴 때마다 벨져가 다시 잡아주었지만.

"날 얼마나 기대하게 만들 셈이오?"
"그게 무슨 소리지?"
"나만 항상 그대를 기다리는 거요?"
"……."
"쓸데없다, 미련하다. 항상 이런 말들로 날 밀어냈지. 하지만 그거 아시오? 난 그래도 계속 그대 옆에 있었소."
"릭."
"매일 사랑한다 말해도 모자라. 난 부족하단 말이오!"
"릭 톰슨!"
"할 말이 있으면 해보시오. 너무 지쳐버렸어. 이제는 벨져, 그대와 같이 있는 것이 좋아서가 아니라 그저 뜻이 같은 동료일 뿐인 것 같소."
"내가 표현이 부족하다고 말하는 건가?"
"벨져, 더 좋아하고 싶단 말이오. 젠장.. 지금 날 보지 마. 한심하기 짝이 없군."
"아니. 나를 봐."
"싫어."
"릭, 두 번은 강요하지 않는다. 나를 봐라."

억지로 고개를 돌려 그를 쳐다보았다. 흔들림 없는 얼굴, 표정. 그런 그가 천천히 다가와 나를 안았다.

"무슨…, 무슨 짓이오."
"기대, 기다림. 나는 항상 그대에게 보답하지 못했다고 생각하니 웃음도 나오지 않는군."
"벨져."
"내가, 미안하다고 하면 그건 더 미련한 짓이겠지."
"벨져?"
"고맙다고 말하기도."
"……."
"릭, 너라면 잘 알겠지. 매일 사랑한다 말하지 못한다는 걸. 하지만 이렇게 네가 힘들 때라면, 언제든지. 몇 번이고."
"벨져."

벨져는 내 고개를 돌려 입을 맞춰왔다. 급하지도, 거칠게 몰아붙이지도 않았다. 부드럽게 감싸오는 입맞춤. 그동안 내가 느꼈던 것들보다 따스하고 조심스러웠다. 그와 내 입술이 서로 떨어지고 한동안 말이 없었다. 서로 고개만 돌리고 있었을 뿐이었다. 벨져는 조용히 먼저 입을 열었다.

"표현에 서툴다는 것은 네가 알아줬으면 좋겠군."
"하하.. 졌어. 사실 그렇게 화가 난 건 아니었소. 보답 받지 못하는 사랑 같아서, 조금 힘들었을 뿐이오."
"릭."
"가끔은 이렇게 힘들어해 볼까."
"나도 가만히 있지는 않겠지."
"..어, 어떻게?"
"오늘은 거짓이 아니니, 이렇게도 키스할 수 있다고 알려줬을 뿐이다. 흠, 예를 들면 밤에 많이 아프다거나."
"벨져도 마찬가지요!"
"하, 재미있군. 어떻게?"
"거짓말하면 나도 한동안 찾아가지 않을 테니까."
"참으로 슬픈 일이군."
"지금 억지로 슬퍼하려고 하는 것 같은데."
"외로울 거야."
"…내가 잘못했소."
"푸흡, 장난이다."

살짝. 아주 옅었고 잠깐이지만 깊은 미소. 내 눈에 비친 벨져의 미소가 담긴 얼굴은 다시 한 번 반하게 만들었다. 나는 속으로 그의 모습에 감탄했다.

"그대의 어머니가 이렇게 아름다우실까, 아버지의 영향일까."
"두 분 다."
"괜한 것을 물어봤군. 정말 아름답소."
"당연한 소리를 하는 군, 릭. 너도 내 옆에 있을 때가 제일 아름답다."
"……."
"…릭?"
"지금 부끄러워 미칠 것 같으니까, 말 걸지 마시오."
"놀리는 재미가 있겠어, 안 그런가?"
"장난은 이제 그만하시오!"
"볼이 빨개졌군."
"끄응…, 물 좀 마시고 오겠소."
"릭."
"……물 마시고 올거니까 다녀와서 말해주시오."

화끈거리는 얼굴을 가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별일도 아닌 것에 화를 낼 뻔한 나는 지금 어디에도 찾아볼 수 없었다. 그가 내 기분을 풀어주어서 그런 걸까, 나까지 피식, 웃어버렸다.

"지금 말해야겠다. 뜸 들이긴 싫거든."
"하하, 좋아. 이쪽으로 와서 말해주면 좋겠는데."
"귀찮게도 구는군. 릭, 사랑한다."
"나도 사랑하오, 벨져."

벨져는 귀찮아하면서도 빠르게 내 옆으로 다가와 허리를 감싸 안으며 말해주었다. 나는 컵을 내려놓고 그의 팔에 손을 얹으며 대답했다. 언제까지고, 함께 있고 싶었다. 이 시간이 오랫동안 이어지길 간절히 빌었다.

"변하지 않을 자신 있소?"
"몇 번을 말해야 이해할 셈이냐. 나 벨져 홀든, 그대가 먼저 변하지 않는다면야. 내 마음도 변할 일은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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