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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퍼즈

크리스마스 합작

놑트 2015. 12. 25. 16:18
[티엔하랑] 눈


“사부…?”
“하랑아!!!”

그의 비명과도 같은, 내 이름이 들렸다. 순간 ‘퍽’ 소리가 나면서 눈앞이 흐려졌다. 손에는 불쾌한 피 냄새와 촉감이 느껴졌다. 토가 나올 것 같았지만 애써 참고 보이지 않는 눈을 부여잡고 그를 불렀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으니 공포가 내 몸을 에워쌌다. 1초라도 빨리 그에게 닿고 싶었다. 지금만은 간절했다. 내게 안정이 필요하다는 것을 몸도 알아차렸는지 굳어서 움직이지 않던 몸이 급하게 그를 찾고 있었다.

“으윽, 사부… 어디에 있어? 아파, 흑, 눈이 보이지 않아.”
“젠장, 하랑아… 여기 있다. 여기 있어.”

그는 다급하게 허공을 휘젓고 있던 내 손을 잡아주었다. 그의 손은 따뜻했지만, 살짝 떨리고 있었다. 하지만 이내 태연하게 내가 헐떡이던 숨과 떨고 있던 몸을 진정시킬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사부의 목소리는 나긋나긋하게 내 귀에 박혔다. 흐릿하고 몽롱한 정신 속에서도 그의 목소리만은 또렷하게 들렸다.

“아파…… 아무것도 안 보여. 사부, 나 너무 무서워.”
“괜찮다. 치료하면 다 나을 거다. 걱정하지 말고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내뱉어라.”
“후, 흐윽, 그… 그게 잘 안 돼. 하, 미안해. 내가 괜히 으윽, 지원 가겠다고 고집 부려서… .”
“쉬이, 그런 건 생각 말아라. 덕분에 더 많은 생명을 살릴 수 있었어. 지금은 잠시 잠을 자 두는 게 어떠냐.”
“좋은 생각이네…. 옆에 있어. 어디 가지 말고.”

나는 옆에 있어달라고, 맞잡은 그 손을 꽈악 쥐고 정신을 잃었다. 그리고 얼마나 많은 시간이 지났을까. 눈을 떠보니 아직도 앞이 보이지 않았다. 촉감은 확실히 붕대였다. 내가 눈을 다쳤구나. 설마 내 눈이 앞으로 영영 보이지 않게 되는 건 아닐까 덜컥 겁이 났다.

“사, 사부? 사부, 어디 갔어? 사부!”

그를 애타게 불렀는데 답이 없다. 어떠한 기척도 느껴지지 않았다. 기분 나쁜 적막함만이 남아 있었다. 거치적거리는 링거를 뽑아 던져버리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젠장, 앞이 안 보이니 어디가 어디인지 알 수 있어야지.”

벽을 더듬거리며 한 발짝, 한 발짝 발을 내디뎠다. 무엇이 어디에 있는 줄 몰라 더욱 조심스럽게 손을 뻗었다. 한참을 걸었을까, 손잡이가 잡혔다. 그 손잡이로 방을 나가기는 성공했으나 여기가 어디인지 알 수 없었기에 섣불리 발을 뗄 수 없었다. 밖으로 나오니 느껴지는 기척들에 나는 허공에 대고 큰소리로 물었다.

“저기, 여기가 어디요?”
“이하랑 병실이다만.”

뭐야, 사부잖아?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벽에 기대 말했다.

“눈은 어쩌다 이렇게 됐대?”
“그날 습격 받는 순간 파편이 눈에 들어간 모양이다. 다행히 부상이 심한 정도가 아니라 생명에 지장도 없고, 상처도 쉬다 보면 저절로 재생될 거라고 하는군.”
“불편해. 아무것도 안 보여서 사부 얼굴이 어디에, 뭘 하고 있는지도 모르고. 붕대도 답답해.”
“……참아라. 이것도 수련의 일종이라고 생각해보는 게 어떠하나.”
“수련에 아주 미쳤지? 남의 고통은 뭐 알 바 아니다, 이건가? 어쩜 그렇게 이기적이야.”
“네가 내 표정을 볼 수 있었다면. 내가 좋아서 이렇게 말하고 있는 줄 아나?”
“그럼 아니라는 거야?”
“아니다.”

사부의 말에는 진심이 담겨 있었지만 내뱉는 말이 너무 괘씸해서 발끈해버렸다. 그에게 화풀이하다 보니 눈이 아려왔다. 흥분할수록 눈에 부담이 간다는 것을 새삼 깨달았다. 겨우 진정하고 그의 부축을 받으며 다시 침대에 앉았다.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누워만 있고 불편하고도 전혀 자유롭지 못한 여유로움에 싫증이 났다.

“아!!! 정말 못 있겠네! 사부, 뭐 재밌는 이야기라던가, 내가 도울 일 없어?”
“내가 유머에 어울리는 사람으로 보이나? 도울 일이라면 마침 다 끝나서 없다.”
“아오… 이런 일벌레 같으니라고.”
“칭찬으로 받아들이지.”
“욕이거든?!”
“내겐 칭찬이다.”
“하! 기가 다 차네? 칭찬받아서 정말 기쁘겠수. 사부는 일하고 평생을 보내지그래?”
“…….”

사부는 내 말에 할 말을 잃었는지 아무 말도 없었다. 그러다 문득 생각난 것이 있어 조금 긴장한 채로 입을 열었다.

“사부.”
“무슨 일이냐.”
“그, 크리스마스 말이야.”
“…그래.”
“나 눈 볼 수 있을까?”
“볼 수 있을 거야. 볼 수 있을 거다.”
“그럴까…?”

얼마 전 들은 소식에 의하면 올해 크리스마스에는 눈이 내릴 거라고 들었다. 작년에는 보지 못한 눈이기에 잔뜩 기대하고 있었는데 이번엔 다른 눈이 이 꼴이니……. 나는 쓰러지듯 누워 이불을 머리끝까지 올려버렸다.

“그전까지 눈이 회복되길 바라야지. 마음먹기에 달렸다.”
“어떻게? 시간은 나를 기다려주지 않아. 한 번 놓치면 끝이라고.”
“너의 눈이 회복되는 것 또한 마음만 잘 먹으면 크리스마스에 맞출 수 있을 거다.”
“붕대를 풀었을 때, 내가 다시 보는 세상이 평소와는 다르게. 하얗게 물들었으면 좋겠어. 눈으로 가득 덮인.”
“그래. 그날, 전망 좋은 곳을 알아보마.”
“……고마워.”
“하, 목소리가 작아서 들리지 않는구나.”
“쳇, 한 번에 알아들으라고.. 고마워.”
“내가 고맙다고 할 날은, 네가 붕대를 푸는 날이 되겠구나.”
“…….”
“좋은 꿈꾸거라. 아프지 말고.”

그렇게 하랑이 눈을 다친 지 벌써 5일이나 지났다. 그러나 그의 눈은 전혀 회복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불안감에 의사를 붙잡고 그의 상태는 얼마나 괜찮아졌는지 물어보면 돌아오는 대답은 항상 ‘기다려라.’였다. 기다리다 못해 답답함에 속이 타들어 갈 지경이었다. 점점 시간을 좁혀 다가오던 크리스마스는 어느새 내일이 되어 있었다. 그렇다. 오늘은 크리스마스이브. 시간은 하랑의 말처럼 자신을 기다려주지 않았고 점점 흘러가고 있었다.

“그것 봐. 벌써 내일이 크리스마스라고.”
“아직이다. 아직 내일이 오기까지 시간이 남아있지 않느냐.”
“그 몇 시간이 나를 낫게 해준대?! 사부는 그것도 몰라? 바보야? 내 눈을 그렇게 빨리 고쳐질 상처가 아니었다고!!”
“나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너에게 눈을 보여주겠다고. 그리 약속했지. 너의 눈은 확실히 좋아졌어. 너의 기가 회복되는 것이 느껴진다면 믿겠느냐.”
“…….”

나와 하랑, 서로 알고 있었을 것이다. 전보다 얼마나 괜찮아졌는지. 굳이 누구에게 물어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지만, 혹시, 아무도 모를, 갑자기 생길 변수는 모르는 법. 우리는 조심하고 또 조심했다. 그만큼 하랑은 간절했다. 언제, 정확히 기억은 나지 않는다. 문득 마틴이 내게 귀띔을 했다. “티엔 씨, 하랑은 눈을 좋아해요. 새하얗고 소복이 쌓여있는 눈을.” 내가 그를 영국으로 데리고 와서 보았던 눈은 손가락으로 셀 수 있을 만큼 적었고 서로 떨어져 있었기에 연락을 주고받기 힘들었다. 마틴의 이야기는 조금 틀렸다. 나와 함께 보는,이라는 말이 빠졌다. 나는 그의 붕대를 천천히 풀어 그의 눈을 확인했다.

“눈을 뜨고 나를 보아라. 그리고 내가 보인다면 내 손을 잡아라.”

하랑은 눈을 게슴츠레 뜨고 눈부신 햇살을 맞이했다. 그리고 인상을 팍 쓰며 내 순을 살짝 잡았다.

“흐릿하게 형태만 보이지만 그래도 보여. 사부의 얼굴, 병실의 구조, 창밖에 날아다니는 새의 형체도.”
“다행이다. 내일, 너에게 보여줄 수 있겠구나.”

나는 하랑을 가볍게 안았다. 다가오는 내일을 기대하며, 그의 눈에 살짝 입을 맞추고 등을 돌렸다.

“…벌써 가게? 이브인데 조금 더 있다가 가면 안 돼?”
“이제 막 눈을 떴는데 편히 쉬어야지. 내일 선명히 눈을 볼 수 있지 않겠느냐.”
“그거야, 그렇지만.”
“하랑.”

나는 문을 나서려다 다시 뒤돌아 그의 침대 끝자락에 걸터앉아 그의 헝클어진 머리를 정돈해주며 말을 이었다.

“아쉬워하는 표정이 숨겨지지도 않아서야. 어린아이를 두고 집을 떠나는 부모의 마음이 바로 이런 것인 것 같구나.”
“누, 누가 아쉬워했다고…!”
“숨기려 해도 다 보이는 건 어찌해야 하지?”
“아, 몰라! 잘 거야!”
“푸흡, 그래 잘 자라. 내일 데리러 오마.”

조용히 병실을 혼자 빠져나와 재단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겨울바람에 감기라도 걸릴까 봐 목도리, 코트와 같은 겨울옷들을 챙겼다. 그리고 그와 함께 눈을 볼 생각을 하다 지쳐 잠이 들었다.

“윽, 지금이 몇 시지?”

눈을 뜨자마자 시계를 확인했다. 지각. 항상 일찍 일어나 준비를 끝내고 여유로운 아침을 맞았던 나로서는 당혹감을 감출 수 없었다. 급하게 대충 정리를 하고 뛰어서 병원까지 갔다. 도착하는 데에는 얼마 걸리지 않았다.

“좋은 아침이다, 하랑아.”
“사부도. 늦잠 잔 거야? 머리가 왜 그래?”
“아아, 조금. 정리하다 잠이 들어서.”
“오랜만에 보는 사부의 모습이 흐트러진 모습이라니, 답지 않네.”
“……조용히 해라.”
“그래도 오랜만이야. 정말, 오랜만에 봐.”

그동안 새하얀 붕대에 가려져 내 얼굴을 잊기라도 한 걸까. 추억을 회상하듯이 내 얼굴을 이쪽저쪽 빠짐없이 어루만졌다.

“그러다 망가지는 것 아니려나 모르겠군. 그만 만져라.”
“푸하! 걱정도 많아. 오늘 어디로 가?”
“그것에 대해서 말인데. 막 눈을 되찾은 아이에게 말하기 미안하다만 잠시 눈을 감아 보아라. 절대로 떠선 안 된다.”
“알았어. 아, 궁금하게. 또 뭘 하려고?”
“가서 보면 안다.”

나는 하랑에게 코트를 입혀주고 목도리를 둘러주었다. 궁금해서 몰래 보기라도 하는 건 아닐까. 먼저 다 알게 되어 재미없게 되는 건 아닐까. 미리 방지하기 위해 내가 직접 눈을 가려주며 천천히 이동했다. 그가 나에게 의지하는 모습은 썩 나쁘지 않았다. 잠시 딴생각에 빠져있다가 고개를 저으며 정신을 차리고 그를 안내했다.

“언제 도착해? 나 얼마만큼 기다려야 해?”
“타이밍도 잘 맞추는군. 도착했다. 눈 떠 보아라.”
“와! 드디어…!”

내가 그의 눈을 가리던 손을 떼고 그는 잠시 뜸을 들이다 게슴츠레 슬쩍 눈을 떠 주위를 확인하다 바로 앞에 보이는 풍경에 놀라 눈을 동그랗게 떴다. 손을 뻗어 눈을 받아보기도 하며 마치 눈을 처음 보는 아이처럼, 입가에 번진 미소를 보았다. 그의 모습에 나까지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예쁘다.”
“병원에서 맞이하는 크리스마스라 미안하구나.”
“병원이 뭐 어때서? 이렇게 좋은 곳을 찾았잖아! 어떻게 찾았어?”
“…간호사에게 물어보았다. 너와 눈을 보고 싶은데 전망 좋은 곳을 추천해 달라고. 여러 명에게 의견을 구했는데 다 이곳을 추천해주더군.”
“정말 예뻐. 다음에도 이때쯤 살짝 다쳐서 병원에 와볼까~”
“내가 사양하지. 그런 짓을 벌였다간 가만있지 않을 거다. 크리스마스고 뭐고 찾아오지 않을 거다.”
“뭘 그렇게 진지하게 받아들여?! 안 아파! 안 다치면 되잖아?”
“그런 생각 또한 너를 다치게 만들 수 있다는 것을 명심해라.”
“아, 알았다고.”

볼을 잔뜩 부풀리며 고개를 홱 돌리고 눈을 바라보는 그를 벽에 기대어 바라보았다. 병원 난간에 쌓인 눈을 모아 뭉쳐서 작은 눈사람도 만들고 크리스마스 캐럴을 흥얼거리기도 하며 혼자여도 즐겁게 놀고 있었다. 그러다 나를 바라보며 말을 걸었다.

“사부, 오늘이 나랑 사부랑 처음 만나고 몇 번째로 맞이하는 크리스마스인지 알아?”
“두 번째.”
“땡! 두 번…… 어떻게 알았대?!”

내가 틀릴 줄 알았는지 옳은 답을 했다고 인식하는 데에 시간이 걸렸다. 처음은, 나와 하랑이 처음 만났던 해에 맞이한 크리스마스. 그때도 이렇게 눈이 펑펑 왔었다. 아직도 잊지 않고 있었구나. 나는 살짝 입꼬리를 올리며 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때는 아무것도 모르던 어린놈이었는데, 그동안 함께 있었던 시간이 무색할 정도로 같이 있지 못했다는 것에 조금 충격이었고 아쉽기도 했다. 지금이라도, 지금에서라도 그와 같이 있다는 것을 위안으로 삼았다.

“잘 기억하고 있구나.”
“그리고 하나 더. 내 눈이 나아서 처음 본 사람이 사부라는 것도.”
“흠…… 눈이나 보거라.”
“하하, 쑥스러워하기는!”
“조용히 해라, 시끄럽다.”
“네~ 네~ 눈 한 번 시원시원하게 오네! 아까는 더워 죽는 줄 알았다고.”
“그런가? 나는 잘 모르겠군.”
“…메리 크리스마스, 티엔.”

크리스마스 인사지만, 매번 오늘이면 들을 수 있는 인사지만 그가 해주는 인사의 느낌은 확실히 달랐다. 아무런 느낌도 들지 않았던 그저 형식적인 인사에 불과했는데 나는 그의 말에 반응하고 있었다. 내가 보는 풍경을 하랑도 보고 있었고 소복이 쌓이는 눈 위에 서로의 목소리가 울려 퍼져 추위를 느끼지 못할 정도로 따뜻했다. 내겐 완벽한 크리스마스 이벤트였다. 배시시 웃으며 인사를 건네는 하랑에게 다가가 가볍게 입을 맞추고 엷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

“고맙다. 너의 눈이 나아서 처음으로 본 사람이 나라니, 최고의 선물이다.”
“하하, 그래? 아 이것 참, 사부 말 돌리는 거 놀리자마자 내가 쑥스러워졌어.”

그가 볼을 긁적이다 고개를 숙였다. 흘러내린 머리카락 사이로 보이는 그의 귀는 이미 빨개질 대로 빨개져 있었다. 부끄럼을 타는 건가. 피식, 웃음을 흘리며 그를 살짝 안아 토닥였다. 그리고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메리 크리스마스, 하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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