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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루세나] 하염없는 빛 하염없는 기쁨


넌 아는지 모르는지.

지금도 내 눈에 선한데.

너무나도 눈이 부셔서 아직도 내 눈에 남아있는데.

그 빛을 넌 아는지 모르는지.


오늘은 비가 내려 발에 땅이 치덕치덕 달라붙는 날이었다. 3학년이 되고 데빌배츠를 아직 한참 모자란 1학년 녀석들에게 넘겨준 그 날 이후, 연습하는 모습을 하염없이 지켜봤다. 아이실드21로 이름을 알린 세나의 활약으로 데이몬에는 미식축구부 지원자가 많아졌다. 우리가 아직 손을 떼기엔 멀었는지 도쿄타워를 빌려달라 찾아온 녀석들을 매몰차게 거절하지 못하고 입부 조건으로 시작한 얼음운반. 역시 전처럼 반 이상이 나가떨어졌지만 끝까지 올라오는 지원자가 꽤 눈에 보였다. 세계 올스타전에서 봤던, 세나를 존경한다던 녀석도 있었고 셋이서 시작했던 우리보단 확실히 인원수는 많이 늘었다. 그들의 아직은 어설픈 전략으로 녀석들을 얼마나 써먹을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수치로 따져보면 약 30% 정도 쓸 수 있을까. 쿼터백이 누구냐가 문제가 될 것이다. 팀의 사령탑인 쿼터백을 누가 맡을지. 2학년 중에는 없을 것이 분명했다. 지원자는 모두 1학년, 미식축구를 해본 경험자가 없다면 한 놈을 뽑아서 쿼터백으로 만들어야 했다. 과연 이 녀석들이 제대로 된 쿼터백을 만들 수 있을까, 이 쿼터백에게 모든 것을 걸 수 있을까.
무엇보다 주장을 맡은 세나는 경기 이외에 부원들을 한 의견으로 모을 힘이 부족했다. 그런 카리스마나 분위기가 부족했다.

“무리하지 말라고 그렇게 말했는데, 저 빌어먹을 꼬맹이는 말이 쓸모가 없어.”

잡생각을 그만두고 운동장을 보니 혼자 훈련 중인 세나가 있었다. 다치지 않았던 것은 순전히 운이 좋고 경이적인 신체 밸런스라서. 일반 사람들이었다면 금방 부상을 입거나 근육통이 왔겠지만 이미 익숙해진 이 녀석의 몸은 그의 무리한 훈련을 동조하고 있었다.

“놔둬. 이제 넌 데빌배츠의 일원이 아니잖아.”
“쳇, 누가 뭐래? 신경 꺼, 빌어먹을 노땅.”
“누구누구 씨가 아주 재미있는 걸 보는 눈빛이거든.”
“응? 뭔데뭔데? 히루마가 재미있는 걸 보고 있다고?”
“으윽, 밀지 마, 이 돼지가!!!”
“어? 세나 군이잖아?”

내 시선이 머물던 곳을 쳐다보던 쿠리타는 쉽게 세나를 알아볼 수 있었다. 물론, 그 옆에 있던 무사시도.

“세나 녀석, 평소보다 연습량이 늘었군. 다른 녀석들도 마찬가지고.”
“킬킬킬, 드디어 선배로서의 자각이 생겼나 보지.”
“세나 군, 점점 성장하고 있어. 올해의 데이몬 데빌배츠도 갈 수 있을까?”
“크리스마스 볼이라면 아직 멀었어. 빈틈투성이 팀이야.”
“녀석들이 어떻게 싸우냐에 따라 달라지겠지만, 쿼터백도, 키커도, 라인의 주축도 사라진 이상 힘들겠지.”
“그런….”

추욱 시무룩하게 뒤를 돌아버린 쿠리타를 발로 차 밀어버리고 노트북을 만졌다. 글자가 눈에 들어오지 않자 무의식적으로 껌을 씹었다. 그리고 다시 창밖을 힐끔. 혼자였던 세나의 옆에 어느새 쥬몬지, 쿠로키, 토가노, 코무스비, 타키가 나와 있었다. 그리고 뒤를 따라 1학년 녀석들까지. 서로 배우고 알려주고 기본부터 튼튼하게 하려는지 녀석들은 딱 봐도 요점을 파악하기 어려운 설명을 늘어놓으며 몸으로 보여주고 있었다. 1학년들도 처음엔 어설프게 따라 했지만 자세를 잡아주고 옆에서 일대일로 개인교습을 해주니 실력이 느는 속도가 확실히 빨랐다. 아주 가느다란 희망의 끈이 생긴 듯했다. 올해도 재밌어지겠는데. 나는 껌을 질겅질겅 씹다가 풍선을 불어 톡, 하고 터지는 소리가 나자 입가에 붙은 껌을 떼어내 입안으로 넣으며 말했다.

“…킥. 글쎄, 어떨까나.”




우산을 쓰고 나와 연습이 끝나고 텅 비어버린 운동장을 바라보니 누군가 달려왔다.

“히루마 선배!”
“킬킬, 미식축구부 주장이 나에겐 무슨 일로?”
“그런 말 마세요.. 가뜩이나 부담스럽다구요.”
“..부장이라는 놈이 익숙해질 때도 됐잖아!! 곧 봄 대회인 거 모르냐?”
“그렇지만…….”

그래도 역시 부담스러워요.. 부끄럽다고나 할까, 민망하다고나 할까…. 결국 그게 그거 아냐. 답답함에 한소리 하려 했지만 내가 그럴 처지가 아니라 참았다. 우리는 언제나 그랬듯이 그의 상담 겸 하교를 같이 했다. 언제부터 같이 했는지는 이제 기억이 나지 않는다. 처음 용기를 내서 같이 가자고 했던 건 세나였을까. 점점 당연한 일이 되어버려 처음에 대한 기억은 흐릿했다.

“점점 좋아지고 있어요. 선배들이 빠지고 많이 부족했지만, 지금은….”
“그래서.”
“네?”
“돌려 말하지 말고 정확히 말해.”
“올해 목표도 크리스마스 볼이에요.”


“그러냐.”

걸음을 멈추고 결심을 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며 대답하는 세나에게서 그 가능성이 더 크게 보이는듯했다. 비가 그치고 구름을 비집고 나온 저녁 햇살이 그를 비춰 눈부시게 빛났다. 또 빛난다. 이 녀석이 무언가를 결심하고 저렇게 진지하게, 망설임 없이 대답할 때마다 빛이 난다. 나는 길을 가다 멈춰 그에게 시선을 빼앗겨버린 것처럼 바라보다 짧게 대답을 하고선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한동안의 정적이 흘렀다.

“비, 많이 올 것 같았는데 빨리 그쳤네요!”
“아아, 그러네.. 라고 할 줄 알았냐? 너는 할 말이 그것밖에 없어?”
“히익..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구요!”
“말재주가 그렇게 없어서야 너랑 누가 다니겠냐!!!”
“그동안 심부름꾼이었는데 말할 기회가 어디 있었겠어요..”

어련하시겠어. 한숨을 푹 내쉬고 가던 길을 마저 걸었다. 그럴수록 이 녀석과 더 대화하고 싶다. 더 그의 이야기를 듣고 싶다. 이런 마음만 점점 커지고 있었다. 무얼 말하면 좋을까 고민하는 것도 내게는 사랑스럽게 보였으니까. 무척이나 반짝거리고 있었으니까. 당장에라도 품에 안아버리고 싶은 것을 꾹 참느라 가방끈을 세게 쥐고 있는 것도 몰랐다. 한참을 걷고 있다가 가방끈을 쥔 손에 땀이 배는 것을 보고 나서야 내가 손에 힘을 주고 있었다는 것을 알았고 조용히 손에 힘을 빼는 것으로 일단락했다. 걷다 보니 시간은 야속하게도 흘러 헤어져야 할 시간이 다가왔다.

“내일, 보러 와주세요.”
“뭐를.”
“이미 누구보다 잘 아시고 계실 거라 믿어요.”

내가 뭘 그렇게 잘 아냐고 물어보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았지만 이미 해답은 머릿속에 있었기에 한숨을 쉬고 입을 열었다.

“연습시합이었나.”
“역시 알고 계시잖아요.”

살포시, 그에게서 미소가 피어났다. 어디와 시합하느냐 물었더니 생각보다 더 이 장소에서 떠나지 못하고 머물게 하는 대답이 들려왔다. 정말 시합 요청을 했단 말이지? 그 녀석들이랑 말이야.

“네, 오죠 화이트 나이츠. 직접 찾아가 연습시합 요청을 했더니 받아주셨어요. 작년의 기억이 떠오른다고 했나..?”
“그럴만 하지.”
“아, 선배도 전에 연습시합을 요청하러 가신 적 있으시댔죠?”
“어.”

“그땐 우리밖에 없었으니까.”

그 우리가 나와 쿠리타라는 건 세나도 알고 있을 것이다. ‘아..’ 하며 표정이 어두워지길래 빛이 사라지기 전에 가야지. 몸을 돌려 집으로 향하려는데 녀석이 길을 막았다.

“왜.”
“저, 열심히 할 거니까요!”
“넌 항상 열심히였잖냐.”
“네?”

나를 가로막고 있던 세나의 머리에 손을 올려 툭툭 쓰다듬고 그의 말을 무시한 채 걸어갔다. 내가 마지막에 한 말이 신경 쓰이는 모양이었지만 더는 듣지 않았다. 듣고 있었다간 한밤중까지 헤어지지 못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집에 들어가자마자 그에 대한 생각으로 잠을 자지 못했다. 이미 자신의 손을 떠난 후배들을 선배로선 응원해주는 게 당연했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걱정이 되고 신경이 쓰이는 게 당연했다. 내가 신입생들의 실력을 모르는 상황에서 무어라 조언해줄 수 있는 상황도 아니었고……

무엇보다 욕심이었다. 나와 같은 필드에서 뛰지 못한다는 것에 대한 불만. 그 나름대로 3학년 없이 무엇을 해보려 안간힘 쓰는 것에 대한 질투. 그가 항상 내 러닝백일 수는 없었다. 이런 생각을 잠시라도 했던 내가 참 우스웠다.

“결국, 이렇게,”

아침이 됐네. 뒷말을 중얼거리길 생략하고 이를 닦고 옷을 갈아입었다. 평소와 다름없이 아침은 패스. 문득 그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내일 꼭 보러 와달라는 신신당부의 말. 시간도 다 되어가고 슬슬 출발해야 늦지 않겠다고 생각한 나는 집을 나왔다. 경기는,

분명 학교겠지.

토요일에도 학교에 간다는 건 보통 학생들에겐 끔찍할지도 모르지만 우리에게 있어선 일상과 같았다. 아니, 일상과 같았었지.

“히, 히루마 선배!!”

여전히 빛나고 있는 세나를 바라보기는 눈이 부셨다. 제대로 바라보고 있기 힘들어서 눈을 깜빡였다. 그런 내가 이상한지 고개를 더욱 들이밀며 나를 불렀다.

“선배?”
“왜.”
“아, 아뇨. 그냥…. 와주셨네요!”
“뭐어, 그렇지.”

눈이 반짝반짝 빛났다. 입가에 번지는 미소까지도. 자리에 앉으면서 난 그와 눈을 마주치지 않았다. 목소리만 들어줘도 좋겠다는 생각으로 입을 열었다.

“다치지 마라.”

순간의 정적. 모든 소리가 멈췄고 나와 세나, 둘만 있는 것 같았다. 그의 대답이 들리기 전까지 난 가만히 눈을 감고 기다렸다. 내 모든 신경을 그의 목소리에 쏟았다. 손은 다시 노트북을 향해 있었지만.

“죽여주마!!!”
“Yeah!!!”

멈칫. 눈을 뜨고 필드를 바라보았다. 마치 작년으로 돌아간 것만 같은, 환상을 보여주는 것 같았다.

‘이 녀석, 잘도 내가 썼던 대사를….’

내 쪽을 바라보며 다시 재미있는 걸 발견한 아이처럼 웃고는 시합에 집중하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키보드를 치던 손이 멈추었고 화면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이미 나는 경기의 한 장면도 놓치지 않기 위해 노트북을 닫아 내려놨다. 그를 보러 온 사람들의 환호성에 둘러싸여 진짜 영웅이 된 세나, 아이실드21을. 아직도 내 눈에 선하게 남은 그의 모습이. 가까이에 있는 것 같아도 저 멀리에 있는 그의 모습이. 내 눈에서 사라지지 않아 아른거렸다. 넌 아는지 모르는지.

그 빛을 넌 아는지 모르는지.


2016/09/01

 +) 2016/09/16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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